1200년 4월 진주에서 노비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고려는 무신 정변 이후로 폭동과 반란이 끊이질 않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점.
진주 노비들은 지역 관리와 호족의 집을 불살랐고,
이때 이 글의 주인공인 '정방의'라는 놈의 집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빡친 정방의는 노비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관가에 들어갔다.
정방의 "노비들을 진압해야 되니깐 얼른 무기를 내노소."
8품 관리 전수룡 "노비들의 반란은 진압해야 마땅하지만, 너 따위가 뭔데 무기를 휴대하고 관가에 들어오느냐!"
관가의 8품 관리였던 전수룡은 무기를 휴대한 정방의를 의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을 했다.
정방의는 결백을 호소하였고, 이에 전수룡이 풀어줬지만,
3품 지방 장관이었던 진주 목사 이순중은 이 소식을 듣고 정방의롤 옥에 가두고 다시 고문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방의의 동생이었던 정창배가 휘하 무뢰배들을 이끌고 옥에 들어와서
정방의를 데리고 나갔고... 정방의와 정창대 형제는 무뢰배들을 모아서 인근 고을을 돌아다니며
주변 백성 6,400명을 학살하는 미친짓을 벌인다.
진주 목사(3품직) 이순중은 겁에 질려서 관가 문을 닫아 나오지 않았고,
정방의는 진주를 장악하고 은병을 모아 무신 정권의 실력자들에게 바치게 되는데...
자신이 벌인 망나니짓을 묻고 진주의 지배권을 확인받기 위함이다.
(고려 시대 고액 화폐, 은병)
하지만 무신 정권에서 보낸 관리가 진주를 순시하다가 이번 사태를 발견하게 되었고,
진주의 관리들은 정방의가 무서운 나머지, 그 죄를 진주 목사 이순중에게 돌리게 된다.
이순중은 파면되었고,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민란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자잘한 반란까지 합하면 엄청나다.)
○ 진주의 공사(公私) 노예가 떼를 지어 난리를 일으켜서 주리(州吏)의 집 50여 호를 무찔러 불사르고, 불이 번져 창정(倉正) 정방의(鄭方義)의 집까지 태웠다. 주리가 목관(牧官)에게 알려서 뒤쫓아 잡으니, 방의가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들어와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보았다. 수룡이 힐문(詰問)하기를, “어째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절하느냐. 네가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로구나.” 하면서 곧 고문을 가하니, 방의가 다른 뜻이 없다고 자백하므로 놓아 주었다. 목사(牧使) 이순중(李淳中)이 이 소식을 듣고, 방의에게 착고를 채워 옥에 가두었다가 그 이튿날 다시 국문하려고 하는데, 방의의 아우 창대(昌大)가 갑자기 뜰에 뛰어들어와서 방의에게 채운 착고를 벗겨 버리고 부축하여 나갔다. 이어 불령배(不逞輩)를 불러 모아 고을에 마구 뛰어다니면서, 평소에 원수진 자 6천 4백 명을 죽였다. 이에 순중 등이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방의가 영(令)을 위협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 조금 후에 방의가 고을 안의 은병(銀甁)을 많이 거두어서, 서울의 세력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 죄를 면하려 하였다.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가 관내를 순시 하다가 진주에 와서 안문(按問)하니, 이민(吏民) 가운데 방의를 두려워하는 자가 많아서 모두 말하기를, “방의는 죄가 없습니다.” 하므로, 순중이 마침내 죄를 받아 초도(草島)로 귀양갔다.
전근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에,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 통하지 않는 일들이 많다.
특히 지방 호족의 입김이 강하고, 중앙 집권력과 행정 체제가 조선보다 덜한 고려 시대에는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하여, 오늘날 믿기 힘든 엄청난 악행과 학살이 벌어졌다.
또한 정방의가 활동하던 시기는 무신 정권 시대로, 수없이 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의 규모도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고 그 사상자도 엄청났다.
고려 정부, 정확히 말하면 무신 정권의 실력자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이들을 살해했고,
몽골 침략기에도 반란은 계속 일어나, 몽골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강화도에 들어간 고려 정부는,
국토가 유린되는 것은 그대로 보고 있으면서도, 자국민이 반란을 일으키면 강화도에서 육지로 군대를 보내
처참하게 학살할 정도였다.
아무튼 몽골 침략 이전의 수십 년 동안 고려에는 계속된 내전으로 국력이 엄청나게 피폐해졌고,
국경 지방에 비축된 식량도 소실되었다.
지역의 호족들은 각기 사병을 이끌고 주도권 다툼을 벌였으며,
이후 조선 왕조는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군의 사병화 경향을 없애버리고,
정부가 지방을 철저히 통제하는 중앙 집권화를 강력하게 시행한다.
여름 4월에 남로병마사가 적(반란군)을 밀성(密城)에서 쳐서 머리 7천 급을 베고, 무기와 우마(牛馬)를 얻은 것도 이와 같았다.
남로병마사가 적(반란군)의 처자 3백 50여 명을 잡아 얼굴에 먹물을 넣고 서해도(西海道)로 귀양보내어 여러 성(城)의 노비에 충당시켰다.
3월에 청주 사람들이 그 고을 사람으로서 서울에 적(籍)을 가지고 그곳에 물러가 사는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그들을 거의 모두 잡아 죽였다. 그 무리로서 서울에 있는 자들이 듣고 원수를 갚고자 하여, 왕의 명이라 속이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청주로 향하였다. 장군 한경뢰(韓慶賴)를 보내어 뒤쫓아가서 제지시키려 하였으나 추급(追及)하지 못하였는데, 고을 사람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이를 금지하지 못했다 하여 목부사(牧副使) 조온서(趙溫舒)와 사심관(事審官)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장군 경대승(慶大升)을 파면하였다.
○ 서북면 지병마사(知兵馬事) 이부(李富)가 서적(西賊)의 남은 무리들이 틈을 타서 다시 일어날 것을 근심하여 다 죽여 없애고자 하였는데, 양식이 결핍하다는 것을 듣고 여러 적둔(賊屯)에 통첩을 보내서 속여 말하기를, “어느 날 어느 성(城)에서 양식을 받아 가라." 하고, 곧 여러 성에 비밀통첩을 보내어 말하기를, “만약 적(賊)이 와서 성에 들어오거든, 마땅히 문을 닫고 모조리 죽이라." 하였다. 이때에 도적을 잡아 죽인 것이 무려 5성(城)이나 되었다. 귀주(龜州)에서 죽인 것이 3백여 명에 이르고, 가주(嘉州) 사람들은 도적 백여 명을 유인하여 창고에 들여 보내고 문을 잠갔더니, 도적들이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켜 창고을 태우고 자신들도 타죽었는데, 양곡이 무려 10만 곡이나 모두 재가 되었다. 적의 괴수 우방전(牛方田) 등이 이것을 깨닫고 다시 무리를 불러 모아 도적질을 하니, 병마사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관군이 이롭지 못하여 안북도호판관(安北都護判官) 함수산(咸壽山)이 전사하였다. 이에 다시 군사를 증원(增援)해서 여러 번 싸워 겨우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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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3)
김교조는 망해서 전주관노가 되었어요~~^^
요약좀
한국사 많이 써주라 ㅇㅂ
헤ㄹ조선 vs 헤ㄹ고려 냐??
한국에 사이코패스가 넘쳐나는 게 멀쩡한 놈들은 다 죽어서임 역사를 보면 민족성이 보인다
읽기귀찮아서 내렸다. 그래서 정방의 이새끼는 어떻게 된거냐?
존나 순진한 새끼ㅋㅋㅋ 무신들 덕에 붓잡게 된 사대부들이 잘도 무신정권 비판글을 쓰겟다 그냥 민란이라면 다 개썅놈의 싸이코 패스 폭도로 밀어부쳐야지 ㅋㅋㅋ 문재이니 대텅렁되니 좌파 진보 다 튀어나와서 대중무현 우상화시키는거 보면 모름?
배우중에 정흥채가 가장 남자다운 외모를 가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