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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리리.. | 24/08/08 10:41 | 추천 40 | 조회 51

(펌)신이 견딜 수 있는 시련만을 준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51 [10]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716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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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깊은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그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고작 스물 두살에 불과했던 내가 상병을 갓 달았을 때

 

스물 일곱살의 그가 신병으로 들어왔다.

 

늦은 나이에 대한 모두의 우려와 다르게

 

늘 잘 웃고 우직하게 작업도 잘했던 그는 행보관의 에이스가 되었고

 

딱 하나 돈을 전혀 쓰지 않는 구두쇠라는 점을 제외하고

 

성실한 후임이자 좋은 선임으로 별 탈 없이 군생활을 했다.

 

내가 병장2호봉을 달고 당직을 서다 그가 탈영했다는 말을 듣기전까지는

 

전 포대에 비상이 걸렸고 BOQ에 있던 간부들이 발등에 불난듯이 복귀하고

 

전부 생활관에 집합해 대기한지 1시간만에 부대에서 철조망만 넘으면 되는 야산에서 그가 발견되었다.

 

목에는 야상끈이 묶인채로, 온 팔목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처음 간부들이 발견했을때는 죽은 줄 알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그는 살아있었고 

 

생각보다 출혈에 비해 상처가 깊지 않아 하사 한 명이 그를 들쳐업고 지통실로 내려왔다.

 

나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을 그 때 처음 보았는데, 

 

야상끈이 처음 목을 조른 부분에서 가장 진한 자국으로 시작해서 턱 바로 아래까지 쓸리듯이

 

목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의 핏줄은 전부 터져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팔 양쪽은 피투성이였지만 제대로 그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3포대장이 말하기를 군수창고에 있던 야상끈을 빼돌려 목을 매달았는데, 몸무게를 버티지 못한 나무가 부러졌고



이에 숨겨둔 면도칼로 손목을 그으려했는데 목을 매고난 후라 전신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긋지 못해 미수에 그쳤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와 나름 친한 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순간 내가 본 그는 태어나서 내가 처음 본 사람 마냥 낯설었다.

 

붉게 피가 터진 흰자에 초점없는 그 눈과 피를 흘리고 있던 그는 

 

내가 몇 달간 봐왔던 그의 겉모습을 한 전혀 다른 생명체였다.

 

나는 그 순간 그가 너무나도 무섭고 이질적으로 느껴져 아무 말도, 괜찮냐는 말조차 걸을 수 없었다.

 

당직사령과 간부들이 한 차례 이야기를 한 뒤, 정보과장이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고

 

경계태세가 해제되고 나는 다시 당직 근무를 섰지만, 

 

그 얼굴과 표정만이 머리속에서 반복재생되었다.

 

왜 그랬을까. 군생활도 그렇게 잘 하던 그가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여러가지 의문과,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라는 죄책감 같은 감정이 함께 올라왔다.

 

그는 결국 병원에서 2주간 시간을 보낸 뒤, 잠깐의 대대장 면담 후 의가사 전역이 결정되었다.

 

별도의 휴가 없이, 의무대에서 며칠 대기 후 바로 전역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포대원들은 이렇다 할 인사도 하지 못했다.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

 

전역 전날, 평소 나를 예뻐하던 행보관의 당직근무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라면에 소주를 한 병 까고는 행보관이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초등학교 때, 생활고로 인해 갓 태어난 동생을 버려둔 채 어머니가 도망가고

 

아버지는 노가다를 뛰다 현장에서 돌아가신 뒤로

 

그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노가다와 편의점을 뛰며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렸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게 아닌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생계를 위한 면제 사유가 되지 않고, 기초수급도 받을 수 없어

 

할머니에게 나오는 30여만원의 보조금이 전부인 상황에

 

면제사유조차 되지 않아 군입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나는 흡연자인 그가 담배를 절대 사지 않았으며,

 

6만원 남짓이었던 군인 월급을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행보관은 잠시 담배를 두 어개피 연거푸 피고는 말을 이었다.

 

중3이던 여동생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다 경찰에 잡혔으며,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자살시도를 한 것이라고. 

 

나는 그동안 불행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던 용돈과, 친구들과 비교하며 사달라고 조르던 브랜드 옷들,

 

가끔 혼나는 때면 부모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철없는 생각들이 복에 겨워서, 불행이라는 단어가 내 짧은 삶을 차마 스쳐 지나가지 조차 못했었기에 

 

그랬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삶의 무게가 버거워서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그렇게 열심히, 누구보다 열심히 버텨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었음에 부끄러웠다.

 

그날은 결국 잠이 오지 않았다.

 

전역 후 가끔 연락하던 포대장에게서 비상연락망에 있던 그의 연락처를 받았지만

 

마치 안부라도 물어볼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받았지만

 

그 번호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차마 연락하지 못했다.

 

번호를 눌렀다가도 차마 걸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술기운에 용기를 얻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ㅇㅇ이형 잘 지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도 답장은 없었다.

 

나는 그가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며 그를 잊었다.

 

몇 년이 지나 전역했던 다른 후임과 페북으로 연락이 닿아 술 한잔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남자 둘과 군대 이야기는 1,2,3차로는 모자라 결국 내 자취방까지 오게 만들었다.



맥주를 마시다 불현듯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ㅇㅇ이형 소식 아냐? 문자 한번 보냈었는데 씹더라

 

그러자 그 후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형 못들었어? ㅇㅇ이형 배달 알바하다가 사고나서 죽었어..

 

형 전역하고 얼마 안 지나서.. 행보관님이 돈 걷고 대표로 갈 사람 있냐고 해서 그때 포대장이랑 몇명 다녀왔었어

 

난 형 아는 줄 알았지.. 일부러 얘기 안 하는 줄 알았어..

 

누군가 식도에 시멘트를 들이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에서 목구멍까지 단단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막혀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수많은 말과 생각과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지만, 그 무엇도 입 밖으로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무엇이라도 조금이나마 그의 등에 쌓여있는

 

삶의 무게를 아주 조금이나마 나눠 들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왜 그에게 그렇게까지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주어야했는지, 무엇이 그렇게까지 그를 내몰았는지

 

술기운과 각종 감정이 휘몰아쳐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잠에 들었다.

 

얼마 뒤 행보관과 포대장에게 그의 여동생과 할머니의 근황이나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중인 상황이라 장례식에 오시지 못하셨으며, 

 

여동생만 만나봤지만 넋이 나가 있어 부의금만 전해주고 왔었다고 했다.

 

아직도 가끔 군대이야기가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이나 지나가는 군인을 보면

 

문득 문득 그가 떠오른다.

 

사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마음 또한 하찮은 것이고, 기껏 알바비를 모은 돈 몇 푼 정도

 

달라질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내가 책임져줄 수 있는 정도의 무게도 아니었고 나도 단지 위선적인 죄책감에 시달릴 뿐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머리속을 떠올랐던, 그의 충혈된 눈을 외면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나의 옹졸함과 비겁함을 씻고 싶어서 그가 떠오른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수없이 많았던 기회들을 비겁한 내가 걷어차버렸음이 부끄러울 뿐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기회가 된다면, 그에게 도움이 되고싶었다고..

 

언젠가 만약에 그를 다시 만날 이후의 세계가 있다면..

 

미안했었다고.. 내 비겁함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  

 

출처 : 익명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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