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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 24/05/05 17:57 | 추천 7 | 조회 15

일러페스로 유게 불탈동안 내가 하고 있던거 +15 [4]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5938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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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본군의 남해안 철수와 강화협상에 따라 전쟁 국면이 이전과 비교하여 소강상태에 접어들긴 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일본군의 준동과 재침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경계는 곧 조선의 명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정보 제공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군사 공조 체제 구축 시도로 발현되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원조주력군이 철수하고 유정의 5천여명의 병력만이 잔류함에, 조선 조정은 1594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군의 재침 가능성을 명 침공설과 밀접하게 결부시켜 명 조정에 전하며 양군 간 군사 협력의 실행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1이러한 의도는 곧 남해안 주둔 일본군의 정세 및 병력 배치 정보의 명에 대한 제공으로 발현되었다. 일본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지속적으로 명에 제공, 공유함으로서 명이 일본군의 조선 재침 가능성을 인식케 하고, 나아가 전쟁이 확전되어 명 본토까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을 인식케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1593년 말~1594년 초 전방에서 수집된 일본군의 함선, 군병 주둔 정보들이 여러 차례 주문과 자문을 통해 명에 전달되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당시 조선이 인식 중이던 남해안 주둔 일본군의 병력과 전선수를 알 수 있다.


만력 22년 2월 16일 주문


(1) 장문포, 영등포의 일본군 함대 현황

-보고 책임자 :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최초 정보 보고자 : 초군 김은금(金銀金)

정보 수집 일시 : 1593년 12월 3일

수집 루트 : 포로

 

일본 전선 배치 상황 

장문포 

대기함선 2백여척. 대기 병력 1천여명.

영등포

대기함선 5백여척, 대기 병력 5천여명.



(2) 천성, 가덕, 웅포, 삼포, 안골포 일본군 함대 현황

-보고 책임자 : 순변사 이빈(李?)

최초 정보 보고자 : 청무인 박말석(朴抹石)

정보 수집 일시 : 1594년 1월 

수집 루트 : 청무인

 

일본 전선 배치 상황

천성, 가덕, 웅포, 삼포, 안골포 

대기 함선 50척.



(3) 김해, 가덕, 천성, 안골포, 영등포, 제포 일본군 함대 현황

-보고 책임자 : 경상우병사 성윤문(成允文)

최초 정보 보고자 : 안복장 최강(崔堈)

정보 보고 일시 : 1594년 1월 8일 

수집 루트 : 적정 탐색

일본 전선 배치 상황

김해, 가덕, 천성, 안골포, 영등포, 제포

대기 함선 40척 또는 80척.


만력 22년 2월 20일 요동도지휘사사 발송 회자


(4) 서생포 주둔 일본군 현황


-보고 책임자 : 도원수/제도도순찰사 권율(權慄)

최초 정보 보고자 : 주회인 원임 주부 윤옥(尹沃)

정보 수집 일시 : 1593년 11월 15일 이후 

수집 루트 : 적정 탐색

서생포 주둔 일본군 

20,000 명



만력 22년 2월 24일 요동도지휘사사 발송 자문


(5) 남해안 주요 거점 일본군 지상군 주둔 현황

-보고 책임자 : 순변사 이빈

최초 정보 보고자 : 청무인 개이(介伊) 등

정보 보고 일시 : 1594년 1월 3일

수집 루트 : 청무인


일본군 병력 배치 현황


김해부

500 여명


동래현

1,000 여명


임랑포

1,000 여명


죽도

5,000 여명


두모포

5,000 여명


부산포

20,000 여명


서생포

20,000 여명


총합 : 52,500 여명



만력 22년 3월 6일 총독병부 및 요동도지휘사사 발송 자문



(6) 남해안 주요 거점 일본군 지상군 주둔 현황

-보고 책임자 : 경상도방어사 김응서(金應瑞)

최초 정보 보고자 : 체탐아병 정승헌(鄭承獻)

정보 보고 일시 : 1594년 2월(각주2)

수집 루트 : 항왜 


일본군 병력 배치 현황

 

서생포 

5,000 여명

 

임랑포

3,000 여명

 

기장

3,000 여명


동래

1,000 여명


부산포

10,000 여명


양산 구법곡

3,000 여명


경상 좌수영

300 여명


김해

18,000 여명


안골포

2,000 여명


가덕

700 여명


웅천, 제포 

4,000 여명


거제

7,000 여명


총합 57,000 여명


출전 : 『事大文軌』 권 8, 만력 22년 2월 16일. 만력 22년 2월 20일, 만력 22년 2월 24일, 만력 22년 3월 6일 주문 및 자문



포로, 주회인, 항왜, 청무인 등을 통한 정보 수집의 결과를 통해 알려진 1593년 말에서 1594년 초 당시 남해안 일대의 일본군 전선 수효는 최소 7백척 이상, 8백여척 내외였다. 또한 일본의 남해안 일대 주둔 병력은 시기에 따라 병력의 이동 등으로 각 지역 주둔군에 차이가 발생하나 대략 5만 2천여명 이상, 5만 7천여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내부 통계가 아닌 정탐 및 정보 수집의 결과에 의한 바 이기에 실제와 다소 차이가 존재하겠으나, 최소한 당시의 조선은 남해안 일대의 일본군 수효를 이 정도로 파악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과 고위험도를 명에게 공유하며 일본군의 재침 의도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게끔 했다.

 

1.이정일,  「임진왜란기 조선의 對일 공수(攻守) 방안 -전쟁 발발부터 1596년 9월 강화협상 결렬까지를 중심으로-」, 『백산학보』 124호, 백산학회, 2022, 304쪽.

2.실록에는 한명련이 1594년 1월 28일 보고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유격 주홍모(周弘謀)에 대한 적정 제공 과정에서 내용이 요약된 탓으로 보인다. 자문을 보면 한명련의 보고와 정승헌의 보고는 별개의 보고이며, 한명련이 1월 28일 올린 정문은 이시언에 의해 2월 17일 치계되었다. 『선조실록』 49권, 선조 27년 3월 18일.

 

 

 

이런 거 쓰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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